당뇨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가장 가슴이 턱 막히는 순간은 식단표를 받을 때가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이 아주 무심하게 “앞으로 술, 담배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말할 때죠.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당장 오늘 저녁에도 회식이 있고 업무 스트레스는 턱밑까지 차오르는데 술과 담배를 한순간에 칼로 두부 자르듯 끊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제 주변에도 본인이 당뇨약을 먹고 있는 당뇨병 환자인 줄 알면서도 술과 담배는 절대 끊을 수 없다며 계속 술마시고, 담배 피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과 담배는 인생 최고의 낙 중의 하나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분들이 스스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소주는 단맛이 없으니까 당 수치 안 올라가지 않을까?” “담배는 칼로리가 제로인데 혈당이랑 무슨 상관이야?” “요즘 나오는 전자담배는 타르가 없으니 괜찮겠지?”
저 역시 이런 궁금증을 갖고 여러 자료를 뒤지고 의사들에게 끈질기게 물어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어설프게 알고 있던 이 ‘소문’들이 사실은 내 몸을 조용히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혈당 수치가 평소보다 낮게 나오는 특별한 이유
많은 당뇨 환자분들이 술을 마실 때 크게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어? 어제 소주 한 병 마셨는데 오늘 아침 공복 혈당이 왜 이렇게 낮지? 술이 체질에 맞나?” 하고 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건 몸이 좋아진 게 아니라 간이 비명을 지르며 뻗어버린 아주 위험한 신호입니다.
우리 몸의 간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몸에 들어온 독성 물질을 해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사를 안 할 때 간에 저장해둔 당분을 조금씩 피로 보내서 혈당을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술이 들어오면 간은 알코올을 ‘최우선으로 치워야 할 독극물’로 지정합니다. 그래서 당분을 만드는 일을 완전히 손 놓고, 오직 알코올을 해독하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이때 당뇨약을 드시거나 인슐린 주사를 맞는 분들에게 비극이 생깁니다. 약 때문에 혈당은 계속 내려가는데, 간이 포도당을 보충해주지 않으니 혈당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겁니다. 이걸 ‘알코올성 저혈당’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자는 동안 이 저혈당이 찾아오면 정말 위험합니다.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려도 술기운에 취해 자느라 깨지 못하고, 심하면 수면 중 의식을 잃거나 뇌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술자리 초반에는 맥주나 막걸리, 과일주처럼 당분이 많은 술을 마시거나 삼겹살, 치킨 같은 고칼로리 안주를 먹어서 혈당이 300 이상 솟구치는 ‘혈당 스파이크’가 먼저 터집니다. 즉, 술은 ‘마실 때는 혈당 폭발, 자고 나면 치명적 저혈당’이라는 이중 작전으로 우리 몸을 공격하는 셈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야 한다면 이것만은 지키세요
현실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술자리를 100% 거절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약 꼭 마셔야 하는 자리라면 제발 아래 4가지만은 스스로와 약속하세요.
- 절대 빈속에 마시지 마세요: 밥을 먼저 먹고 혈당을 어느 정도 올려둔 상태에서 술을 마셔야 간이 당을 끊어버려도 저혈당 쇼크로 직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 달달한 술 대신 깔끔한 증류주를 고르세요: 과일소주, 칵테일, 맥주, 막걸리는 당분 덩어리입니다. 차라리 소주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를 아주 조금만 마시는 편이 당장 혈당이 튀는 것을 막아줍니다.
- 술 한 잔에 물 두 컵: 물을 많이 마시면 술의 독성도 희석되고, 이뇨 작용으로 인한 탈수를 막을 수 있어 다음 날 혈당 조절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 자기 전에 혈당 한번 꼭 재보세요: 술 마시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혈당을 쟀을 때 100 이하라면, 귀찮더라도 우유 한 잔이나 크래커 두세 조각을 꼭 먹고 자야 자는 동안 저혈당으로 응급실에 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담배는 칼로리가 없는데 왜 당뇨에 치명적일까?
“술은 저혈당 때문에 위험하다 쳐도, 담배는 칼로리도 없고 당분도 없는데 왜 그렇게 끊으라고 난리일까?”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당뇨 관리에서 담배는 어쩌면 술보다 훨씬 더 흉악한 놈입니다.
당뇨병이라는 질환의 본질을 파고들면 결국 ‘혈관 질환’입니다. 피 속에 당분이 너무 많아서 혈관 내벽을 긁어놓고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죠.
그런데 담배 연기를 마시는 순간, 니코틴과 일산화탄소가 혈관으로 들이닥칩니다. 니코틴은 안 그래도 당분 때문에 약해진 혈관을 가늘게 수축시키고, 피를 끈적끈적하게 만들어 피떡(혈전)을 형성합니다.
당뇨 환자가 담배를 피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 인슐린이 약발을 안 듣게 만듭니다: 니코틴은 체내에서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킵니다. 이 호르몬들은 인슐린이 세포에 당을 넣어주는 과정을 방해합니다. 즉, 담배를 피우면 당뇨약을 제때 챙겨 먹어도 약효가 반토막이 난다는 뜻입니다.
- 합병증 시계를 10년 당깁니다: 당뇨의 가장 무서운 합병증 3가지가 있죠. 눈이 마비되는 망막병증, 신장이 망가져 투석을 해야 하는 신증, 발끝 감각이 사라지고 썩어 들어가는 발 궤양.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이 합병증들이 찾아오는 시기가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 빠릅니다.
- 심장과 뇌가 갑자기 막힙니다: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질 확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당뇨 환자보다 2~3배 이상 급증합니다.
궐련형, 액상형 전자담배는 괜찮은가요?
요즘 연초 담배 대신 아이코스 같은 궐련형 전자담배나 액상형 전자담배로 바꾸고 나서 “나 이제 금연 비슷하게 하고 있어”라고 위안 삼는 분들이 계십니다. 냄새도 안 나고 타르도 적다고 광고하니 마음이 놓이시는 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자담배 역시 당뇨 환자에게는 연초 담배와 똑같이 위험합니다.
전자담배에 타르나 일부 유해 물질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제일 중요한 ‘니코틴’은 여전히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당뇨 환자의 혈관을 좁히고, 인슐린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방해하는 주범은 타르가 아니라 바로 니코틴입니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한 내 몸의 혈관은 계속해서 쪼그라들고 있고, 인슐린 저항성은 계속 악화되고 있습니다. 전자담배는 금연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스스로를 속이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끊고 줄여야 할까?
술과 담배를 둘 다 마시고 피우던 사람이 오늘부터 둘 다 제로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며칠 못 가 폭음과 폭연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죠.
따라서 당뇨 관리를 할 때는 나름대로의 전략적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당뇨 환자의 현실적인 행동 수칙]
1단계: 담배는 무조건 단칼에 끊는다 (타협 없음)
2단계: 술은 횟수와 양을 정해서 철저히 조절한다
담배는 줄이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끊는 겁니다
담배는 “하루에 5개비로 줄여야지” 같은 연착륙이 안 됩니다. 한 개비만 피워도 혈관은 즉시 수축하거든요.
의지만으로 끊으려고 하지 마세요. 당장 가까운 보건소 금연클리닉이나 내과에 가셔서 상담을 받으시고, 금연 보조 약물(챔픽스 등)을 처방받으세요. 요즘 약들은 약을 먹으면 담배 맛 자체가 없어지게 해줘서 의지력 소모를 10분의 1로 줄여줍니다.
술은 완전히 끊지 못하더라도 규칙을 만드세요
술은 담배와 달라서 ‘회식’, ‘모임’이라는 사회적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안 마신다고 참다가 한 번에 터져서 폭음하는 게 제일 나쁩니다.
일주일에 딱 1번만 마시겠다고 날을 정하세요. 그리고 그날은 소주 반 병 이내로 마시되, 안주는 두부나 생선구이, 채소 위주로 챙겨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겁니다.
글을 마무리지으며
당뇨를 관리하다 보면 매일 아침 손가락을 질러 피를 뽑고 숫자를 확인하는 일에 지치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당 수치 10~20 올라가는 게 뭐 대수냐” 싶어 술 한 잔 던지고 담배 한 개비를 물게 되죠.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당뇨 관리의 진짜 목적은 매일 찍히는 당 수치 숫자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내 발로 산책을 하고, 내 눈으로 자식들의 얼굴을 보고, 뇌졸중이나 심장병으로 침대에 눕지 않기 위해 혈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술자리에서 술 한 잔 대신 물 한 컵을 비우는 것, 주머니 속 담배갑을 내려놓는 그 작은 선택 하나가 10년 뒤 여러분의 삶을 결정합니다. 오늘부터 나 자신을 위해 작은 것 하나부터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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